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제주

10. 달의 어두운 면
중국 허난성 차별

중국의 내륙지역인 허난(河南)성은 대륙 9주의 중심지역이었으며 고대로부터 중원(中原) 이라고 불리던 교통과 상업, 농업의 요충지였다. 하, 은, 주 시대에는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으며 한나라 부터 수나라 시대에 이르는 약 600년간 중국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할 만큼 번성한 중원문화의 발상지였다. 그런데 이러한 도시의 찬란한 역사와 대조적이게도, 중국 내에서 허난성 지역과 지역민들에 대한 인식은 심각할 정도로 나쁘다. 허난성은 가짜 상품의 생산지이며 허난성 출신 사람들은 모두 음흉하고 사기꾼 기질이 있으며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다는 인식이 당연스럽게 퍼져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의 대기업 채용시험에서 단지 허난성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채용이 취소된 경우가 발생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된 적도 있었다. 중국 내에서도 허난성 차별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겨지고 있으나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허난성은 '개혁개방 시대에 뒤쳐져 경제적으로 소외된 지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런 근거없이 차별받고 있다.

【출처】 [월드리포트] "허난성 사람은 안 뽑아요"…중국의 뿌리 깊은 지역 차별. SBS 뉴스

만보산 사건(한국내 화교 혐오) (1931)

중국의 길림성 장춘현에서 촉발된 사건이다. 당시 일제강점기 한국의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모두 빼앗겨버린 탓에 만주 지역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는 중국 침략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이를 방관하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재만 한국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의 지배권을 두고 중국과 일제는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때 일제는 중국인 학영덕이라는 자를 매수하여 만보산 지역 수로를 개척하기로 한다. 이 사업은 지역 농민들에게 피해를 줄 만큼 무리한 사업이었으며 게다가 학영덕은 사업의 필두에 한국인 농민을 두어 중국 농민들과의 충돌을 의도적으로 유도했다. 결국 한국 농민들과 중국 농민들의 깊어지는 갈등의 골이 터지며 무력 충돌이 발생했는데 중국과 일본의 경찰들의 총격전까지 일어나는 참사가 벌어졌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으며 비교적 빠르게 진정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언론은 한국에 이 사건을 과장하여 보도하였고, 만주에서 중국인의 손에 무참히 죽어간 한국 농민들에 관한 거짓 뉴스를 본 한국인들은 분노에 찬 학살을 벌였다. 인천을 시작으로 경성, 부산, 천안, 원산, 평양, 대전 등 각지에서 중국인을 향한 구타, 살해 등 잔인한 폭력사태가 시작되었다. 이 기간동안 일제는 한일 양국에서 중국인 배척을 목적으로 한 선동과 은밀한 공작행위를 더욱 가속화 했으며, 이 기간동안 한국과 일본 내에서 죽은 중국인이 수백명에 달했다. 이 후 이를 간파한 한국측은 일제에 매수되어 거짓뉴스를 전파한 기자를 사형에 처하고, 사건의 내막을 중국에 알렸다. 이로 인해 중국과 만주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에 달했고 중국인들과 한국의 독립투쟁가들이 협력하며 일제에 저항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출처】 이정희(2018). 《화교가 없는 나라》. 동아시아.
전영욱(2020). 《질문하는 한국사 4 - 근대, 근대는 아픈 역사일까?》. 나무를 심는 사람들.

미얀마 로힝야족 학살과 SNS (2014 ~ )

미얀마 내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공존해 민족 갈등이 잦은 편이나,특히 수많은 부족들 중 유일하게 무슬림인 로힝야족에 대한 차별과 핍박이 심각하다. 로힝야족은 과거 미얀마의 중간지배층을 이룰 정도로 힘이 막강한 민족이었다. 19세기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시절, 영국 정부가 미얀마의 주류 민족인 버마족, 샴족, 몽족을 견제하기 위해 소수민족들에게 지배권을 주었다. 특히 쌀 생산 노동력을 위해 자신들이 벵골 지역으로부터 이주시킨 로힝야족 에게 중역을 맡겨 분할통치를 유도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미얀마를 떠나고,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과 라카인족을 비롯한 주류 민족들은 다시 주도권을 잡아 지배층이 되었으며 영국을 등에 업고 자신들을 억압했던 로힝야족 에게 보복을 자행했다. 그 이후부터 라카인족과 로힝야족의 차별과 충돌은 유독 두드러졌고 사회적 차별과 핍박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14년 로힝야족 남성이 라카인족 여성을 강도살인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수십년 간 민족간 충돌이 잦았던 미얀마지만, 이번에는 SNS '페이스북'으로 공유된 소문이라는 점이 다르다. 2012년 법 개정으로 인해 기존 200달러를 지불해야만 구입할 수 있던 USIM카드가 2달러가 된 것. 미얀마 국민들 사이에 스마트폰이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인구의 1/3이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하게 되었다. 또 특이한 점은 그 인터넷 이용자들은 오직 '페이스북'만을 사용한다는 것인데, 구글을 비롯한 많은 웹사이트들이 미얀마의 언어환경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이스북 본사에는 미얀마 언어를 모니터링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폭력을 조장하고 거짓 선동을 유도하는 포스팅들이 5년이상 게재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퍼진 확대된 거짓 소문으로 인해 결국 라카인족 불교 근본주의자들과 미얀마 군부는 로힝야족을 향한 학살을 자행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로힝야족은 4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미얀마 군부에 의한 인종청소이자 학살범죄라고 주장했다.

【출처】 로힝야족. https://ko.wikipedia.org/wiki/로힝야족

Myanmar’s ‘Gravest Crimes’ Against Rohingya Demand Action, U.N. Says. The New York Times

The country where Facebook posts whipped up hate. BBC news

제중원 소동 (1888)

근대 한국과 중국은 초기 서구 문물의 수용에 관해 민감한 태도로 일관했다. 열강의 힘에 의한 개항 이후, 급격히 변화하는 시민 사회를 마주한 기득권층에게 서구의 문화는 곧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특히 개인의 존재와 자유를 중요시 여기는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의 확산을 가장 경계했다. 그래서인지 백안의 선교사들과 개종한 한국인들에 대한 박해도 일어나곤 했다. 그러한 시기를 보내던 중, 선교사들은 고아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는데 당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가족도 아닌 어린이들을 어떠한 보상도 없이 받아들인다는 행위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의구심은 곧 불안과 분노로 변하였고 끝내 선교사들에 관한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어린 아이들의 눈으로 카메라 렌즈를 만들며 부녀자들의 가슴을 잘라 우유를 짜낸다는 등,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 횡행했다. 그리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은 어린이 환자들을 약의 재료로 쓴다는 소문이 돌며 급기야는 폭동이 일어났다. 성난 폭도들은 외국 공사관과 선교사 사택에 방화와 투석을 일삼았으며, 공사들과 선교사들은 자국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대피하기까지 했다. 이 후 고종황제의 포고문이 각지에 배포됨과 동시에 미국, 러시아, 프랑스 군대가 포도청과 협력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와 재산 피해가 있었으며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미개한 국가.'라는 오명을 얻어 향후 외교에 큰 차질을 빚었다. 이 소문들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길과 장소에 낙서나 글씨가 쓰여진 돌멩이 등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출처 모를 소문을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서양인에게 겁을 집어먹은 조선의 민심을 이용하여 체제 전복을 노린 청나라의 계략이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며, 대원군이 고종을 축출하기 위해 꾸민 음모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출처】 옥성득(2016).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 짓다.

마녀사냥

14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불어닥친 유럽의 ‘마녀사냥‘은 대략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대략 20-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웃의 제보나 의심에 의해 체포되고 잔혹한 고문과 종교 재판 끝에 마녀 혹은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는 과부나 빈곤 계층의 여자들이 주로 지목되었고 어린 자녀가 눈에 띄게 건강하거나 혹은 자주 아파도, 쉽게 마녀로 몰려 자녀와 함께 화형 시키는 일도 빈번 하였다. 마녀나 마법사로 판정되어 사형을 집행하면 재산까지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재산 탈취의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자행되었다. 1550년 1650년까지 100년 가량 전 유럽에 걸쳐 가장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출처】 Hartmut Bossel(2010). Zufall, Plan und Wahn: Chronik der Entwicklungen, die unsere Welt veränderten, S. 129.

털사 인종 학살 (1921)

미국 인종 차별 역사에 있어 가장 참혹했던 사건이다. 사망자가 200여 명에 달했는데, 이 역시도 정확한 집계가 아니다. 사건 발발 이후 100년이 지난 2021년 현재에도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며, 해당 지역인 오클라호마에서는 정치인 선거 후보들이 가장 민감하게 다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국의 독립 이후 오클라호마는 미국 정부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킨 지역이었다.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46번째 정식 주로 인정받았는데, 이러한 이유로 백인들의 유입이 늦게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미국 곳곳의 심각한 백인 우월주의를 피해 이주한 흑인들과 기존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랜 세월동안 오클라호마 안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며 제법 큰 재산도 축적하기도 했다. 오클라호마의 그린우드 라는 지역은 상류층과 중산층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는데, 그래서 그들은 이 지역을 '블랙 월 스트리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늦게서야 유입된 이주민 백인들에겐 이 잘 사는 흑인들이 너무나도 못마땅했다. 1921년 5월 30일 오클라호마의 털사 시에서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의 단순한 실랑이가 있었고, 이 실랑이는 곧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에 대해 성범죄를 저지른다는 소문으로 확대되었다. 백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거리로 뛰쳐나와 많은 흑인들을 폭행하고 살해했다. 가장 눈엣가시였던 '블랙 월 스트리트'는 백인들의 방화로 모두 타 버렸고, KKK단(Ku Klux Klan)같은 극단주의 집단은 흑인들을 린치하여 살해했다. 심지어 개인 소유의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흑인 거주지역에 다이너마이트 등을 던지는 자들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흑인들은 남부를 떠나 미 대륙의 북부나 서부, 동부로 떠나갔다. 2001년에는 오클라호마 주위원회의 조사에 의해 이 사건이 당시 털사 시 당국과 백인들이 서로 공모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출처】 털사 인종 학살. https://ko.wikipedia.org/wiki/털사_인종_학살

 미국판 킬링필드 '털사 학살', 100년만에 실체 드러나. 노컷뉴스

T4 작전

1939년~1941년 나치는 우생학 이데올로기에 따라 T4작전이라 불린 장애인 안락사 정책을 실시하였다. 정신병원에서 총 8만~10만명의 정신지체장애인을 학살했고 효율적인 대량 학살을 위해 페놀 주사를 개발하였다. 희생자 중에 아동은 5,000명이고 유태인은 1,000명, 나머지의 대부분은 독일 국민이었다. 1941년 8월 18일 나치 독일은 공식적으로 계획을 중지한다고 발표했으나 그 이후에도 비밀리에 장애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작전을 포함한 안락사 정책을 통해 결국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약 20만 명, 나치 치하의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10만 명의 장애인이 학살당했다.

【출처】 Lifton, Robert J. (2000) [1986]. 《The Nazi Doct ors: Medical Killing and the Psychology of Genoc ide》. New York: Basic Books.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관동 지역에 진도 7.9급의 초강력 지진이 발생하였다. 대규모 화재와 함께 도쿄, 요코하마 지역을 비롯한 관동 지역 일대가 궤멸되다시피 한 커다란 피해가 발생하였는데, 혼란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하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등의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확대되며 일본 경찰관이나 자경단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체포되고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 수는 약 6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초기 이주자들과 소중한 인재였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그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출처】 한계옥 (1998년 4월 10일). 〈관동대진재 당시의 조선인 대학살〉.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 조양욱 1 1쇄 판. 서울: (주)자유포럼.

흑사병—유대인 학살 (1346 - 1353)

전염병이 확산되기 시작하면 바이러스 자체가 퍼지며 사람들을 감염시키지만, 그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전염병 앞에 무기력한 인간들의 심리적 변화이다. 이 불안과 공포는 심화되며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향해 집중되기도 하며 무조건적인 비난과 탄압을 일삼기도 한다. 인류 역사에서 이러한 인간들의 심리변화는 항상 존재했으며, 2020년 COVID-19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중국인, 아시아인 차별 등 비슷한 양상으로 드러났다. 14세기 유럽인들은 감염 시 사망률이 95%이상인 이 질병으로 인해 극에 달한 공포를 느꼈다. 죽어가는 모습마저 너무나도 처참해서 이 질병을 '흑사병'이라고 불렀다. 특별한 치료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신에게 기도하거나 엉터리 약을 마시는 정도였다. 이들도 역시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풀어내야 할 대상이 필요했고, 이 대상은 유대인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흑사병 감염율이 낮았고 이는 그들의 율법에 의한 철저한 위생 관리 덕분이었다. 외출 후 옷과 몸을 깨끗이 하고, 손을 자주 씻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흑사병은 유대인이 의도적으로 퍼트린 재앙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과격한 단체나 개인들은 유대인을 납치해 고문 등으로 강제 자백을 이끌어냈다. '악마의 지시에 따라 우물에 병원균을 넣었다.'라고 자백한 유대인 포로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18세기 중반 흑사병이 사라지기 전 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한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으며 그 이후로도 한동안 유럽인들의 혐오 대상으로 존재했다.

【출처】 '흑사병이 유대인 탓?'. 서울경제

구자라트 학살 사건 (2002)

인도 서부에 위치한 구자라트주는 인구가 7천만명이나 되는 거대 자치구이다. 대양을 마주한 긴 해안선을 가진 이 지역은 교통과 상업이 매우 발달하여 '서인도의 보석'이라고 불리며 싱가포르 혹은 두바이와 비교되곤 한다. 인도는 국민의 대부분이 힌두교도일 정도로 힌두교 문화가 가장 발전해 있다. 그러나 주변 국가들은 주로 이슬람 문화권이며 인도 국민의 약 20%는 무슬림이다. 특히 각각의 강한 종교색채로 인한 분쟁이 많은 지역이며 '아요디아 사건', '카슈미르 분쟁' 등 심각한 유혈사태를 일으킨 사건들도 있었다. 구자라트주 고드라시 에서 고드라 역을 떠난 기차가 알 수 없는 까닭으로 무슬림 밀집지역을 지나다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리고 무슬림들의 투석과 방화로 인해 열차에 탑승한 승객 5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필 당시에는 앞서 언급한 '아요디아 사건'으로 인해 힌두교도들과 무슬림간의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던 상태였다. 무슬림들은 아요디아의 성전을 파괴한 힌두교 극우주의자들에 대해 극심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기에 힌두 수구 세력들은 이 열차 학살 사건이 무슬림들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무슬림들의 투석은 있었으나 인명피해의 결정적 원인인 방화를 일으킨 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힌두 수구 세력들은 이 사건이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기도 전에 그들은 칼과 도끼로 무장하고 무슬림 사냥에 나섰다. 지역 방송에서는 열차에서 희생당한 피해자에 관한 내용과 무슬림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내용이 밤낮없이 이어졌다. 누가 봐도 폭동을 자극하고 주도하는 방송이었다. 이 한달간의 학살 기간동안 구자라트 안에서는 '세상의 모든 죄악'이 모두 일어났다. 무슬림들의 외침에 공권력도 무응답으로 일관했으며, 무슬림들은 영아부터 노인까지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출처】 ‘모든 종류의 죄악’ 그 중심에 새 총리가 있다. 시사IN

미국 내 증오범죄

FBI는 1930년부터 UCR(Uniform Crime Reporting) 프로그램을 통해 증오범죄 사례를 수집하고 매년 통계를 집계해 발표하고 있다. 2018년 한 해 동안 미국 내에서 발생한 증오범죄(hate crime)는 7천120건으로, 전체의 19%인 1천200건이 성소수자를 목표로 폭력이나 살인을 저지른 혐오 범죄이다. 특히 미국 내 유대인 인구는 2%에 불과하지만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는 전체의 10%를 점했다. 종교가 원인이 된 증오범죄 1천550건 가운데 60%에 달하는 896건이 반유대주의(Anti-Semitic)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흑인의 미국 내 인구 비중은 13.4%이지만, 흑인을 겨냥한 증오범죄는 그의 두 배인 26%에 달했다.

【출처】 FBI UCR(Uniform Crime Reporting) 프로그램 증 오범죄 사례 수집 통계 집계. https://ucr.fbi.gov/hate- crime/2018/resource-pages/about-hate-crime

미즈호 학살 사건 (1945)

일제 강점기의 재외 한국인들은 세계 정세의 흐름에 따라 운명이 정해졌다. 자신을 보호해 줄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조국의 땅을 떠나 살아간다는 것은 무방비 상태에 놓인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동북아시아 지역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과 소련 미국이 서로 맹렬히 무력 공격을 퍼붓던 상태였다. 일본과 소련의 주요 분쟁지역이었던 사할린 섬은 정세가 매우 불안한 지역이었다. 사할린 섬은 원래 일본의 본토였으나 패전 후 소련의 영토로 편입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한국인들은 모진 핍박과 감시 하에서 살아갔다. 그러나 1945년 8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투하 이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는 사할린 섬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이때 사할린 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배를 타고 본국으로 귀환했으나, 한국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사할린 섬에 그대로 남겨졌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지배하에 편입된 한국인들은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되었으며 이후 '고려인'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렇게라도 살아남은 한국인이 있었던 반면, 일본의 거짓 선동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한국인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건인 '미즈호 학살 사건'은 남사할린 미즈호 마을(현 지명: 포자르스코예)에서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이다. 소련의 남하 소식을 들은 사할린의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귀환하며 잔존 일본인들 사이에 '우리가 패한 이유는 한국인들이 러시아의 스파이였기 때문이다.'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트린다. 미즈호 마을에 남아있던 재향군인과 마을 청년단들은 한국인들을 학살했다. 패전과 소련의 남하로 인해 자신들이 가지게 된 공포와 좌절을 해소할 이유로 죽창과 군도로 마을의 모든 한국인들을 제거한 것이다. 이때 사망한 한국인은 아이들과 부녀자를 포함 약 35명에 달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미즈호학살사건(─虐殺 事件)).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contents_id=E0072253

세일럼 마녀재판 (1692)

1692년 6월,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의 항구도시 세일럼에 60세 여성 브리짓 비숍의 목에 밧줄이 걸렸다. 북미에서도 간헐적으로 마녀 소동이 있었지만 세일럼은 이전 과 다르게 커다란 규모로 광기에 휩싸여 진행되었다. 연쇄 고발로 마녀로 지목되어 투옥되어 고문당하거나 처형당한 186명 중에는 환갑을 넘긴 노파에서부터 어린 소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돈을 악착같이 모았거나 행실이 나빠 평소 미움을 샀던 사람들이 주로 죽었다.

【출처】 Salem witch trials. https://www.britannica.com/event/Salem-witch-trials 

COVID-19 확산으로 인한 아시아인 혐오 (2020 ~ )

한국과 일본, 홍콩, 베트남의 일부 식당과 상점에는 ‘중국인 거부’ 팻말이 붙었다. 한국과 일본에선 온라인 뉴스 댓글이나 트위터 등 SNS를 통해 혐중 메시지가 늘고 있다. 중국인에게 ‘바이오 테러리스트’라고 극단적으로 비난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이를 넘어 유럽에선 동아시아인 전반의 혐오로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에선 지역 언론매체인 <르 쿠리에 피카르>가 ‘황색 경보(Alerte Jaune)’라는 인종차별적 헤드라인 기사를 내보냈다. 이탈리아에선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이 동양인의 수업 참석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베네치아에선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현지 어린이들이 침을 뱉는 사건이 발생했고, 폼페이 등 주요 관광지에서 중국인 입장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카솔라 에서는 한 중국인이 술집에 들어갔다가 맥주병으로 머리를 맞기도 했다. 헝가리에선 베트남인 상점 주인이 ‘나는 중국인이 아니다’는 문구를 유리창에 내걸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여자사립학교는 전염 가능성을 이유로 한국계 여학생에게 2주간 기숙사에 들어오지 말라고 통보했다. 이 학생은 상하이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코로나 사태 이전이었고, 검사결과 감염되지 않았다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중국인 유학생이 구타를 당해 한 쪽 눈이 실명될 위기에 처했다. 2020년 2월 3일 손흥민이 축구 경기에서 승리한 뒤 인터뷰에서 땀을 흘리며 두 차례 마른 기침을 하자 외국 축구팬들이 인터넷 상에 ‘손흥민이 COVID-19에 감염된 것 아니냐’ 는 취지의 댓글과 함께 손흥민과 함께 있는 선수들 사진에 마스크를 합성하며 조롱했다. 런던에서는 싱가포르 출신 학생이 구타를 당했으며, 런던 서부에서 동양인 세무사가 10대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사상 초유의 팬데믹 시대에 인류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이 '근거없는 선동과 차별'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난 사례들이다.

【출처】 호주 여학교, 넉달 전 중국 다녀온 한국계 학생 기숙사 '퇴출' 논란. 조선일보

중국 다녀온 교수는 두고…한중일 학생 특정해 출입금지. 국민일보

르완다 내전

르완다의 소수파로서 지배층을 형성해온 투치족과, 다수파로 피지배 계층인 후투족 간의 국가 통치권을 둘러싼 내전이다. 1994년 4월 6일부터 7월 중순까지 약 100여일간 약 80만명에서 100만명의 투치족이 살해당했다고 추산된다. 이는 역사 상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살해된 기록인데, 당시 투치족의 약 70%, 전체 르완다 인구의 약 20%에 해당된다. 현재 르완다 정부는 이 학살에서 100일 동안 1,174,000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것은 1일당 1만명, 1시간당 400명, 1분당 7명이 살해당한 것과 같다.

【출처】 Des Forges, Alison (1999). 《Leave None to Tell the Story: Genocide in Rwanda》. Human Rights Watch. ISBN 1-56432-171-1.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23)

오스만 제국은 서기 1299년 부터 1922년까지 무려 600년이 넘도록 동유럽의 대부분 영토를 차지한 거대 제국이었다. 이 제국 안에는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있었는데 아르메니아인들도 그 중 하나였다. 술탄의 절대권력을 중심으로 유지해온 오스만 제국은 20세기가 되며 시대에 걸맞지 않은 체제를 고집하고 있었다. 낡고 힘없는 제국 안의 소수민족들은 하나 둘씩 독립을 외쳤고 술탄은 이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였고, 아르메니아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제국 안에서도 오랜 기간동안 차별을 받아왔다. 광범위한 영토의 오스만 제국에서는 문화와 언어가 서로 다른 소수민족들이 많았지만 국교만큼은 이슬람이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자손이라고 자부심을 가질만큼 확실한 크리스천들이었다. 이 이유로 인해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 안에서도 하등시민 취급이었으며 변두리의 볼품없는 민족 정도로만 여겨졌다. 1차 대전 발발 후, 러시아 제국에게 대패한 오스만 제국은 그동안 독립을 외쳤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같은 종교를 가진 러시아의 편을 들어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기밀을 빼돌렸기 때문에 우리가 패했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러시아 제국과 인접한 국경 인근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을 외쳤다는 이유를 들면서 배신자로 지목했다. 그들이 무슬림이 아닌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도 거기에 한몫 했다. 결국 1915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행해져 온 오스만 제국의 소수민족 탄압 과정에서도 30만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했었다. 거기에 이런 저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패전의 원인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뒤집어 씌워 학살을 확대하고 가속화 한 것이다. 이 학살은 1923년 까지 이어졌으며 그 기간동안 150만명 이상이 잔혹하고 엽기적인 방식으로 학살당했다. 현재까지도 이 사건은 터키와 동유럽 피해 국가들간의 갈등으로 남아있다.

【출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https://ko.wikipedia.org/wiki/아르메니아인_집단 학살

[현미경] 美, 104년 前 '아르메니아 대학살' 공식 인정. 조선일보

홀로도모르 (1932 ~ 1933)

1932년 소비에트 연방 치하에 있던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던 대기근이다. 당시 스탈린은 농작물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집단농장 정책을 도입하여 효율적이고 계획적인 농작물 생산 시스템 구축을 시도했다. 기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그러한 집단 농장 체계가 일반적이었으나, 우크라이나는 자영농들에 의한 농경사회였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에 토지와 작물을 하루아침에 헌납해야 하는 현실에 극렬히 반발하였다. 토지가 비옥한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의 농작물 생산량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쿨락(Кулак) 이라고 불리는 자영농들은 그것을 주도하는 집단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농작물의 생산성 저하의 원인을 이 쿨락들의 반발이라고 지적하며 그들이 가진 토지와 가축, 작물, 종자까지 수탈하였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소문과 탄압에 휘둘린 쿨락들은 '가진 것들을 빼앗기느니 먹어버리자!' 라며 가축들을 도살하고 작물들을 먹어치웠다. 일할 마소와 사료가 없어진 우크라이나에서는 기근이 급격히 시작되었으며, 이 기근은 소비에트 연방 전역에 심각한 식량난을 초래하였다. 불과 2년만에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가 1,000만명에 달했으며 당연하게도 우크라이나의 피해가 가장 컸다. 당시 우크라이나 길거리에는 시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뒹굴었으며 '식인' 행위도 종종 일어났다. 현재까지도 우크라이나 법원에서는 이 기근을 두고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학살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최근 몇몇 좀비 영화나 드라마가 국민들의 PTSD자극을 이유로 우크라이나에서 상영이 금지된 바 있다.

【출처】 홀로도모르. https://ko.wikipedia.org/wiki/홀로도모르             

홀로코스트

1930년대 초반부터 1945년까지,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태인은 약 600만 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대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 유태인 어린이가 약 백만 명,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총 400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하였고, 나머지 200만 명이 질병 등 사유로 사망하였다. 같은 기간 동안 나치에게 학살된 집시의 수는 약 22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불결하고 문란하며 유아를 납치하고 살해한다는 오해를 받은 집시들은 당시 유럽에 70만명에서 100만명 정도 살고 있었다고 한다. 1933년에서 1944년 사이에 나치에 의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10만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 중 약 5만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갱생‘을 이유로 5천명에서 1만5천여명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가슴에 분홍색 뱃지를 달고 분류되어 수용소에 수감된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성적 모욕과 고문, 생체 실험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

【출처】 Fitzgerald, Stephanie (2011). 《Children of the Holocaust》. Mankato, MN: Compass Point Books.

Gilbert, Martin (2002). 《The Routledge Atlas of the Holocaust》. Routledge, London & New York. ISBN 0-415-28145-8. (ref Map 182 p 141 with Romani deaths by country & Map 301 p 232) Note: formerly The Dent Atlas of the Holocaust; 1982, 1993.

The Holocaust Chronicle, Publications Interna- tional Ltd., p. 108.

보스니아 인종청소

1992년 3월부터 1995년 11월까지 약 3년 8개월에 걸쳐 일어난 보스니아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끔찍하고 처참한 민족 분쟁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992년 EU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분리·독립을 확정했다. 당시 보스니아 내 35%의 인구비율을 차지하던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본격적인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다. 세르비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 민족이 이슬람교인 보스니아계와 가톨릭교인 크로아티아계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이 전쟁으로 약 10만~11만명이 사망하고 22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여 보스니아는 ‘유럽의 킬링필드‘로 불리게 되었다.

【출처】 Tabeau, Ewa; Bijak, Jakub (2005). War-relat- ed Deaths in the 1992–1995 Armed Conflicts in Bosnia and Herzegovina: A Critique of Previous Estimates and Recent Results. 《European Journal of Population》 (Springer Netherlands) 21 (2–3): 187–215.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5.18 ~ 27)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1980년 5월부터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고, 국회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5월 17일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정치인과 재야 인사 수천 명을 감금하고 국회를 봉쇄했다.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5월 18일에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괴 남침설’을 작성하여 보고했으나, 육군본부나 주한미군은 ‘북괴 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를 차지하기 위해 이용한 구실이라고 보았다. 훗날 ‘북괴 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5월 18일 16시부터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분노하였고, 중장년층 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들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의 집단발포와 봉쇄 작전 등을 펼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시민들이 사망하였다. 5월 27일 0시 계엄군이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하면서 진압작전은 끝이 났다. 열흘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와 부상자, 행방불명자를 포함하여 약 3천7백여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냈고 3천여명에 달하는 시민이 교도소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잔인한 고문, 구타, 비인격적 모독 등을 받으며 거짓 자백을 강요당했다. 이후 오랜 시일 동안에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 이가 많았고, 그 중 10% 이상이 자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검찰은 1994년에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핵심 쟁점이 밝혀지지 않았고, 발생한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출처】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www.518.org/)

제주 4.3 사건 (1947 ~ 1954)

1947년 3월, 제주의 한 어린아이가 경찰이 타고 가던 말 발굽에 치이는 일이 발생하여 제주 군민들이 항의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6명의 시민이 사망하였고, 잡혀 가서 고문을 받던 3명의 청년이 사망하면서 도민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마침내 1948년 4월 3일 새벽에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의 12개 경찰서를 공격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고, 정부는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 후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가 되었다. 처음에는 좌파 이념을 가진 사람을 색출하겠다고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까지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잡아 살인을 저지르는 지옥의 섬이 되었다. 1949년 1월 17일 군인들이 제주 북촌 초등학교 운동장에 마을 주민 350여명을 모아 놓고 모조리 집단 총살한 것을 비롯하여 1954년 9월 공식 진압이 마무리될 때까지 학살당한 총 희생자의 공식 집계는 1만 5천명에 이른다.

【출처】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1~2003). 제주4.3사건자료집.

캄보디아 ‘킬링필드’ (1975 ~ 1979)

베트남 전쟁 중, 베트공 게릴라들의 보급선을 막기 위해 미군이 캄보디아에 폭격을 퍼부으면서 1970년대 캄보디아는 심각하게 불안정했다. 게다가 미국과 베트남이 휴전 협정을 맺은 후 캄보디아 정부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중단되면서, 반미 감정을 등에 입은 공산주의 반군 크메르루주는 수도 프놈펜을 차지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크메르루주가 온건한 정책을 펼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으나, 수장인 폴포트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의 의미로 ‘0년’을 선언하며, 완벽한 혁명사회인 농업사회주의 국가를 구축하고자 했다. 도시민들을 농촌의 집단 농장으로 이주시키고 강제 노역을 하게 했고 저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고문과 처형이 가해졌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TV 또는 라디오를 소유한 사람, 교사와 승려 등 부르주아나 지식인들과 소수민족들도 모조리 학살했다. 이로 인해 1975년에서 1979년 단 5년 동안 약 300만 명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산한다. 설상가상으로 농업정책도 실패하면서 캄보디아 인구의 1/4이 크메르 루주의 학살과 기아 및 질병으로 사망했다.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주를 실각시킴으로써 집단학살은 끝났지만, 현재까지 2만개가 넘는 집단매장지가 발굴되었으며, 이러한 집단매장지를 킬링필드라고 부른다.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학살이 “인구 정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출처】 마이클 우드(2009).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마로니에북스.